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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그런지 스타일 패션이 되다.

열무냥냥 2023. 6. 14.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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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지 스타일 패션이 되다.

 

 그런지(grunge) 패션이라 하면 grunge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처럼 '보잘것없는, 조악한, 쓰레기'라는 의미를  떠올리는 패션일까? 그렇다면 그것을 과연 패션이라 칭할 수 있을까? 패션 트렌드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그런지 패션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먼저 그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 세기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급변하는 시기였으며, 20세기 후반에는 새로운 세기에 대한  막연힌 두려움과 동경 그리고 기존 사고방식의 경계를 허물고 비주류의 문화가 혼합되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장르가 붕괴, 융합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다양한 하위문화를 만들어냈으며, 패션에서는 젊은이 중심의 스트리트 패션으로 표현되었다. 그런지 패션은 미국 시애틀을 중심으로 활동한 그룹 Nirvana의 그런지 록 (rock)에서 강하게 영향을 받은 스타일로 1992년경 영국스트리트 패션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하위문화는 당시 소외된 젊은이들의 염세주의와 불안, 분노 그리고 현실에 대한 냉소적인 감정을 표출한 것이었고 이것은 음악적 성향이나 패션에 표현된 스타일을 미루어보아 짐작할 수 있다. 그런지 스타일의 반항적인 이미지는 미학적으로 미(美)와 추(醜)의 통합적 양상으로 표현주의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표현주의 작가들의 격렬한 감정과 왜곡된 표현은 혼란스럽고 새로운 형태를 창조해 내는 그런지 스타일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이는 내적 심리의 불안을 디자인의 탈 형식이라는 외적 표현 형태로 나타낸 것으로 공 격적이며 강한 비주얼로 강한 개성과 불안감을 표출한다. 

 

 하위문화의 한의 형태로 시작된 그런지 스타일은 구멍 난 스타킹, 찢어진 청바지, 헝클어진 헤어스타일, 얼룩진 화장 등으로 패션을 표현했으며, 이는 젊은이의 반항심을 대변하는 수단으로 대중성, 상업성이 있는 패션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런지가 하나의 패션 트렌드로서 디자이너 쇼의 테마로 그 스타일을 지속하는 것은 마크 제이콥스 (Marc Jacobs) 같은 디자이너들의 시도, 즉 그런지를 비롯한 스트리트 패션을 하이패션으로 끌어올려 패션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상업적 성공은 커녕 대중성도 얻지 못했지만 현대패션에서 스트리트 패션부터 하이패션까지 넘나들며 우리 시대 중요한 문화, 예술 키워드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지 패션의 표현기법은 여러 가지 아이템들을 다양하게 레이어링 (layering) 하는 방법, 재활용(recycling)이나 자연으로의 회귀 현상을 보이는 패치워크, 이질적 소재의 믹스&매치(Mix & Match)를 활용하는 특징이 있다. 그런지 패션을 하이패션에 처음 도입시킨 디자이너는 드리스 반 노른(Dris Van Noten), 마틴 마지엘라 (Martin Magiela)와 같은 신예 디자이너였으며, 이후 미국의 디자이너들이 중심이 되어 1993년 S/S컬렉션에 도입하며, 전세계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1993년 하이패션으로 도입된 그런지 패션은 기존의 스트리트룩 이미지와 데님의 사용이 절제되고 레이어링과 믹스&매치 기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마크 제이콥스는 1993년 S/S컬렉션에서 기존의 가치에 저항하는 새로운 패션이라는 호평과 쓰레기라는 혹평을 동시에 받았는데, 그의 컬렉션에 표현된 그런지 패션은 이질적인 소재와 색상, 문양, 스타일에 이르는 다양한 믹스&매치 스타일을 표현해 현대인의 감성과 개성을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1992년 12월 보그 (VOGUE)에 소개된 마크 제이콥스의 1993 S/S 컬렉션을 위한 화보는 체크, 꽃무늬 패턴과 낡은 니트 소재, 투박한 모직 외투, 닥터마틴 (Dr. Martens) 등의 다양한 소재의 조화와 중성적이며 자유로운 느낌이 1990년대의 에콜로지 트렌드 또한 느낄 수 있다.

 

 낡고 허름한 빈곤미(貧困美)는 그런지 패션이 표현하는 중요한 디테일 요소로 나타난다. 표현 기법으로 탈색이나 염색, 찢거나 구멍 뚫기, 올 풀기 (Fringing) 등 미완성적인 마무리를 이용한다. 또한 의도적으로 얼룩을 프린트하고나 진흙이나 오염물질을 묻혀 의도적으로 낡고 누더기 같은 느낌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빈곤미에 중점을 둔 그런지 패션은 마치 홈리스를 연상시켜 홈리스 시크 (Homeless chic)라는 트렌드로 자주 표현되기도 한다. 크리스찬 디오 르(Christian Dior)의 2000년 꾸튀르 컬렉션으로 홈리스의 느낌을 주기 위해 누더기 같은 소재 느낌의 조화, 구멍 나고 낡은 니트, 신문지를 걸친 듯한 신문 프린트 등을 선보였으며, 비비안 웨스트우드 (Vivienne Westwood)의 2010-2011A/W 컬렉션으로 두꺼운 외투와 여기저기서 모아 입은 듯한 다양한 소재의 믹스, 그리고 낡고 오염된 듯한 디테일 장식이 그런지 스타일을 완성시킨다. 또한 비비안 웨스트우드 특유의 유머러스한 홈리스 퍼포먼스가 이 컬렉션의 콘셉트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는 그런지 패션의 풍자적 유희미로 사회에 대한 갈등과 비판, 문제의식을 패션이라는 표현예술로서 표출시킨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날의 그런지 패션은 초기 그런지 스타일이 표방하던 안티 패션이 아닌 이 시대 모든 것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삶의 태도와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010년 이탈리아 보그에 실린 스티븐 마이젤 (Steven Meisel)이 연출했던 'Performance'는 남루한 홈리스의 이미지를 패션매거진의 표지로 장식했다는 것이다. 2008년 후반 시작된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빈곤미는 소박한 멋과 자유로운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며 디자이너의 컬렉션의 콘셉트로 자주 등장하였다. 이는 그런지 스타일이 스트리트 패션부터 럭셔리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활용되며 일상의 패션으로 자리 잡았음 을 보여주고 있다.

 

paperbag princess

 

 Craig McDean이 연출했던 'Paper Bag Princess"라는 제목의 화보는 각각 프라다 쇼핑백과 페라가모 쇼핑백이 널려있는 바닥을 배경으로 두고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를 상징하는 두 브랜드의 쇼핑백 위에 몸을 맡긴 모델의 모습에서 그런지 패션의 과시적 현대의 풍자와 동시에 빈곤미를 느낄 수 있다. 과시적 빈곤미는 부를 과시하기 위한 전통적인 조형성을 거부하고 빈곤미를 선택하게 함으로써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강한 개성을 표현하는 역설적 표현 방식을 선택하여 의도적으로 빈곤미를 강조한 것이다.

 

 2013년 재조명되는 그런지 패션에서도 위에 설명한 믹스&매치, 빈곤미, 레이어링 등의 요소 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 풍의 체크무늬 패턴과 다양한 소재의 조화, 방랑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소품이 캐주얼한 느낌과 전원적 느낌을 준다. 김보성이 연출했던 한국판 보그 화보는 패션 아이콘으로 잘 알려진 G-Dragon과 모델 김성희가 그런지 패션의 이미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헝클어지고 정리되지 않은 헤어 스타일과 손에 든 악기는 그런지 스타일의 근원인 그런지 록을 떠올리게 하며 아무렇게나 겹쳐 입은 듯한 레이어링 연출은 홈리스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빠질 수 없는 요소는 체크무늬 패턴과 어우러지는 퍼 (fur), 가죽, 데님 등의 다양한 소재의 믹스&매치이다. 과거 시즌 중 그런지 패션 스타일을 가장 잘 보여준 컬렉션은 에디 슬리 먼 (Hedi Slimane)이 이끄는 Saint-Lauren 2013A/W 컬렉션을 들 수 있다. 컬렉션에서 보이는 남녀 모습에서 2013년 그런지 패션을 이해할 수 있다. 빨간색 체크 패턴 셔츠와 프린징 한 데님, 레이스 원피스와 드레스, 울 코트 등이 일상의 패션과 만나 자유로운 개성과 그런지 패션의 트렌드를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2013년 화보와 유행하던 아이템만 보아도 당시 시즌에  빨간 체크 패턴 셔츠와 프린징 장식 데님은 머스트 해브 아이템 (Must Have Item)이 분명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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