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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yohjiyamamoto.co.jp

 

요지 야마모토 Yohji Yamamoto 

 

 요지 야마모토의 1981년 파리데뷔는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패션계는 당황해하며 이 낯선 일본 디자이너의 파리 데뷔작을 두고 '히로시마 시크'라 부르며 혹평하기에 이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지 야마모토는 당시 지배적이던 미학을 과감히 깨트려버렸습니다. 그의 쇼에는 파워숄더도 미니스커트도 하이힐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얀 메이크업을 한 모델들이 비대칭적인 검은 옷과 플랫 슈즈를 신고 등장했습니다. 80년대의 화려한 팜므파탈은 갑자기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던 것입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듯한 까마귀 같은 실루엣이었습니다. 이처럼 요지 야마모토는 단순히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패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시한 인물입니다. 그의 디자인이 실루엣과 형태에 미친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는 언제나 이러한 철학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디자인 자체는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어려운 점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는 데 있습니다."

 

 요지 야마모토의 패션을 해석하는 핵심 단어는 '해체주의'입니다. 그는 서구의 테일러징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체계적으로 분해하고 재구성합니다. 솔기를 옮기거나 절개를 변경하고 색채를 거의 배제시키고 동시에 서양의 오뛰꾸트르의 세련미와 일본의 절제미를 결합시켰습니다. 흑백의 대비는 그의 선명하고 직선적인 디자인에 날카로움을 더합니다. 그는 몸을 강조하기보다는 감싸는 방식을 선택했고 전통적인 미적 기준을 벗어난 독특하지만 시적이고 균정 잡힌 패션을 만들어 냅니다. 이는 유행을 초월하는 디자인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 그의 작품이 외면받았던 초기 반응이 단 2년 만에 순수한 찬사로 바뀐 것은 그의 아이디어가 가진 힘과 독창성을 증명하는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요지 야마모토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변화가 점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패션은 창의적인 도시인의 새로운 지위로 자리 잡았습니다. 1987년 당시 패션계의 떠오르던 스타였던 아제인 알라리아는 자신의 쇼 준비가 한창이던 중 요지 야마모토의 쇼를 보기 위해 달려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검은색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진 야마모토는 가라테 유단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결코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고 조용히 옷을 디자인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고 인터뷰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법학을 먼저 공부해야 했습니다.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홀로 그를 키운 어머니는 재봉사로 생계를 꾸리며 아들에게 법학 공부를 강력히 권했다고 합니다. 야마모토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했지만 곧바로 법학 서적을 패턴 팩으로 바꾸고 1969년 26세의 나이로 일본의 분카 패션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972년, 야마모토는 자신의 브랜드 Y's Inc. 를 설립하고 어머니 가게 뒷방에서 패턴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5년 후 도쿄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넓고 텐트 같은 의상이 큰 인기를 끌어, 유명한 세이부 백화점에서는 이를 위한 특별 코너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의 연인이었던 디자이너 가와쿠보 레이와 함께 향한 파리에서 그들은 공식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캘린더에 최초의 해외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올렸습니다. 오늘날 야마모토의 이름은 전 세계 주요 플래그십 스토어의 문을 여전히 장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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